동해 한복판에 솟아오른 신비의 화산섬 울릉도,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거친 산세를 따라 성인봉(984m) 자락에 오르면, 사방이 높은 외륜산으로 둘러싸인 채 거짓말처럼 평평하게 펼쳐진 거대한 분지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울릉도 유일의 넓은 평야 지대인 '나리분지(羅里盆地)'입니다. 나리분지는 화산 분출 후 마그마가 빠져나간 자리가 무너져 내리며 형성된 전형적인 화산성 칼데라(Caldera) 지형입니다. 이곳은 독특한 지형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겨울철이면 2~3m가 넘는 기록적인 폭설이 쏟아지는 대한민국 대표 다설지(多雪地)로서의 독특한 기후 특성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혹독한 눈보라를 슬기롭게 이겨내기 위해 조상들이 고안해 낸 전통 가옥 구조 '우데기'와 '투막집'은 인간과 자연환경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가옥지리학의 걸작입니다. 나리분지와 알봉의 화산학적 탄생 과정, 동해의 해양성 기후가 빚어낸 엄청난 강성의 원리, 그리고 폭설을 극복한 전통 주거 양식(우데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불이 꺼지고 땅이 가라앉다 : 나리분지와 알봉의 칼데라 형성사
울릉도는 신생대 제3기 말부터 제4기에 걸쳐 동해 해저 2,000m 바닥에서 솟구친 거대한 해저 화산입니다. 그 화산 활동의 대미를 장식한 흔적이 바로 나리분지입니다.
1. 마그마 방의 붕괴와 칼데라의 형성
- 과거 화산이 격렬하게 폭발하면서 땅속 마그마 방(Magma chamber)에 차 있던 막대한 양의 마그마와 화산재가 지표 밖으로 한꺼번에 분출되었습니다.
- 내부가 텅 빈 마그마 방 위의 지반이 상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도넛 모양으로 푹 꺼져 주저앉았는데, 이렇게 함몰되어 만들어진 거대한 화산 분지를 칼데라(Caldera)라고 합니다.
- 가라앉은 바닥에 화산재와 주변 산지에서 깎여 내려온 퇴적물이 덮이면서 오늘날 완만한 평탄면을 이루는 나리분지가 탄생했습니다.
2. 화산 속의 또 다른 화산, 이중 화산과 알봉(중앙화구구)
- 칼데라가 형성된 이후, 분지 안쪽에서 끈적끈적한 조면암질 용암이 한 번 더 솟아오르며 작은 돔 모양의 화산체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중앙화구구(中央火口丘) 또는 알봉(538m)이라고 부릅니다.
- 이 알봉이 솟아오르면서 원래 하나의 큰 분지였던 나리분지는 나리마을과 알봉마을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게 되었으며, 울릉도는 분화구 안에 또 다른 화산이 들어앉은 전형적인 이중 화산(Double Volcano)의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2. 겨울이면 바다가 구름을 빚다 : 동해의 습기와 폭설 메커니즘
울릉도는 연평균 기온이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띠지만, 겨울철 강설량만큼은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다설(多雪) 지역입니다.
1. 호수 효과(Lake Effect)와 지형성 강설
- 겨울철 시베리아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건조한 북서 계절충이 상대적으로 따뜻한 동해 바다를 건너오면서 막대한 양의 수증기를 증발 흡수합니다.
- 수증기를 잔뜩 머금고 묵직해진 눈구름이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울릉도의 높은 화산 산맥(성인봉 등 1,000m급 산지)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2. 기록적인 적설량
- 산비탈을 타고 급격히 상승한 공기는 단열 팽창하며 응결되어 굵은 함박눈으로 변해 섬 전체에 쏟아집니다.
- 한 번 눈이 내리면 하루 만에 50cm~1m 이상 쌓이는 일이 다반사이며, 나리분지 일대는 겨울철 누적 적설량이 2~3m를 훌쩍 넘길 정도로 거대한 은세계로 변합니다.
3. 눈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 : 너와집, 투막집과 외벽 방벽 '우데기'
이처럼 집 지붕까지 눈이 차오르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울릉도 주민들은 자연에 순응하면서도 실용적인 독창적 주거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1. 자연 재료로 지은 튼튼한 보금자리, 투막집과 너와집
- 섬에 흔한 솔송나무, 너도밤나무를 가로로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두껍게 귀를 맞추어 쌓아 올린 투막집(귀틀집)을 지었습니다. 틈새에는 진흙을 발라 겨울철 칼바람을 차단하고 실내 보온성을 극대화했습니다.
- 지붕은 강한 바닷바람에 볏짚이 날아가지 않도록 얇게 쪼갠 두꺼운 나무판자(너와)를 얹고 돌로 단단히 눌러 고정했습니다.
2. 눈보라를 막아주는 가옥 속의 복도, 우데기
- 울릉도 전통 가옥의 가장 독창적인 특징은 가옥 본채 외벽을 둘러싸고 있는 억새나 수수깡으로 만든 가벽인 '우데기'입니다.
- 기둥 바깥쪽 처마 끝에 우데기를 두르면 본채 벽과 우데기 사이에 처마 밑 복도 형태의 독립된 완충 공간인 '까치구멍/툇간 공간'이 생깁니다.
3. 눈 속에 갇혀도 일상이 이어지는 공간
- 눈이 처마 높이까지 높게 쌓여 창문과 출입문이 완전히 막혀도, 우데기 안쪽의 툇간 복도를 통해 방과 방, 부엌, 헛간, 변소, 외양간 등을 신발을 적시지 않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습니다.
- 외부의 거센 한풍과 눈보라가 본채 내부로 바로 들이치지 못하게 공기 단열층 역할을 해주어, 영하의 겨울에도 난방 효율을 획기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마무리 : 거대한 눈밭 속에 피어난 삶의 꽃
울릉도 나리분지와 우데기는 화산의 뜨거운 분출이 빚어낸 지질학적 경이와, 겨울 바다가 몰고 온 차가운 폭설에 맞선 인간의 지혜가 가장 평화롭게 공존하는 국토의 보석입니다. 사방의 높은 산등성이가 병풍처럼 감싸 안은 칼데라 평원 위로 쏟아지는 순백의 눈보라, 그리고 그 두터운 눈더미 속에서도 불을 밝히며 온기를 유지했던 우데기 두른 투막집들. 지형이 주는 고립을 삶의 터전으로 바꾸고, 가혹한 폭설을 지헤로운 건축으로 품어낸 울릉도 사람들의 흔적은 우리에게 인간이 자연의 조건과 어떻게 가장 조화로운 대화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